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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고전 작곡가

by apriljane 2024. 6. 9.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 

 1. 베토벤 교향곡 5번

2. 비발디 사계

3.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

4. 파헬벨 캐논

5.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6.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7.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8.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

9. 그리그 아침

10. 쇼팽 녹턴

 

10위 안에 있는 곡 중에 무려 세곡이나 베토벤이 작곡한 곡입니다.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작곡가들 중 단연 1위인 베토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베토벤의 어린 시절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독일 본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출생지 본은 라인 강 상류 서안의 문화 · 정치 · 종교 · 군사상의 중요 도시이며, 그의 생가는 오늘날도 베토벤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 요한은 궁정의 테너 가수로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차남 루트비히와 3, 4남을 제외하고 일찍 죽었다. 두 동생은 술꾼에다 벌이가 없는 아버지와 함께 이윽고 베토벤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의 꿈은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루트비히의 나이를 속이게 한 적도 있었지만 타고 난 노력형인 그에게 신동적인 화려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단지 1787년 17세의 나이로 빈 연주 여행에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모차르트에게 그의 장기인 즉흥 연주를 하여 주목을 받았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베토벤의 작곡 재능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지도를 한 것은 궁정 오르가니스트 네페였다.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돌봐 주었으며, 겨우 13세로 부궁정 오르가니스트의 지위를 주고 제2의 모차르트로서 세상에 소개한 바 있다.

 

2. 빈의 젊은 작곡가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은 역시 빈이었다. 모차르트는 이미 죽었지만 하이든은 건재했고, 음악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재력과 취미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본에 싫증을 낸 베토벤은 하이든에의 정식 입문을 결심했다. 다행히 발트슈타인 백작의 주선으로 관비 유학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백작의 소개로 리히노프스키 후작의 살롱을 비롯한 빈의 사교계에 드나드는 편의도 주어졌다. 빈 유학은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으로 실현되었으나, 주위의 악풍은 아직도 보수적이어서 신참 청년 음악가가 인정받기에는 높은 벽이 있었다. 모처럼 사사한 하이든도 바쁜 생활로 새 제자를 돌봐줄 수 없었으며, 오늘날에는 무명에 가까운 작곡가들에게 지도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탁월한 피아노 연주로 빈 학계에 데뷔했고, 작곡도 당연히 피아노 음악에 중점이 놓였다. 1795년 25세 때 최초의 공개 연주회에서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젊은 마이스터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해부터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완성되는 1800년까지를 3기로 분류하는 그의 창작가의 제1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시기에는 어느 것이나 전통적인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작품에서 보이는 창의는 이미 거장의 장래를 암시하고 있다. 사후에 그의 유품 속에서 3통의 편지와 2통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는 두 동생과 한 여성에게 남겼으며, 편지는 연호도 수신인도 없지만 같은 여성에게 보낸 열렬한 연문으로, 특히 그 1통에서는 나의 불멸의 연인이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여성이 줄리에타인지 테레제인지, 혹은 딴 여성인지 여러모로 논란을 빚어 왔다. 줄리에타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바쳤으며, 테레제와는 1806년에 약혼한 바 있었다. 이 약혼은 불행히도 깨어지나 두 사람의 애정은 그 후에도 계속되고, 둘 다 일생을 독신으로 보낸다. 베토벤의 애정의 대상은 어느 것이나 신분이 다른 귀족이나 부호의 딸로서, 계급을 초월한 사랑은 자유사상가답지만, 동시에 그것이 파정을 초래하는 커다란 원인이었다. 1802년 여름 의사의 권유로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간 그는 귓병의 불치를 인정하고 너무도 가혹하십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창작에의 의욕은 마침내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마 같은 인생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이윽고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를 실마리로 빛나는 제2의 창작기로 들어간다. 그의 생애를 엄습한 이 제2의 위기를 타고 넘어 절망의 골짜기에서 기어오르려면 뭔가 실마리가 필요하였는데, 대공의 대사교 취임식을 위한 장엄 미사의 착상은 그의 마지막 심지를 당기게 하였다.

 

3.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리라

 

그는 미사의 완성에 온 힘을 쏟았다. 구상은 써 나아감에 따라 거대해졌으며, 결국 취임식에는 연주되지 못했지만 그는 총보의 첫머리에 ‘마음에서 또다시 마음으로 가리라’라고 적고 대공에게 바쳤다. 미사 완성을 위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미사와 병행해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Op.109, 110을 비롯한 작품은 쉽게 돈 마련이 되지 않았으며, 부랑자로 잘못 알고 유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침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교향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전부터 구상한 새로운 교향곡이, 본 시대부터 품고 있었던 실러의 장편시 환희의 송가 음악화의 소망과 결합하는 기회에 이르렀다. 최후의 대작, 교향곡 제9번 합창교향곡은 이렇게 해서 실현된 것이다.

 

4. 고고한 베토벤 악성의 만년

 

대작에의 의욕은 아직도 있었지만, 러시아에서 돌아온 옛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슈판치히의 4중주단 결성은 그를 크게 자극했다. 마침 러시아의 갈리친 후작으로부터의 의뢰도 있어서, 그의 창작은 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마지막 5곡의 현악 4중주곡을 완성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미 13년간이나 4중주곡을 쓰지 않았지만, 만년의 고독한 체념을 토로하는 데는 극도로 치밀한 이 형식이 가장 어울렸던 것이라 평가받고 있다. 1826년 12월 그나이젠도르프에 사는 동생 요한의 집에서 돌아온 베토벤은 복부의 격통과 폐렴을 앓고 있었다. 청년 시대부터의 지병인 장 질환은 고치기 어렵게 악화되어 네 번 수술을 했지만 어느 것이나 효과가 없었으며, 이듬해 1827년 3월 26일 56세의 생애를 마쳤다. 베토벤은 한 사람의 세계적인 음악가로서나 음악사상에 남긴 공적을 생각하더라도, 전무후무의 대음악가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 베토벤 이후의 음악가로서 기법이나 규모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사람은 적지 않은데, 바그너나 브람스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드뷔시나 라벨처럼 베토벤과는 이질의 아름다운 울림을 찾아내고, 완벽하게 다듬어 간 음악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타오르는 듯한 정의감에 뿌리박은 엄격한 도덕성을 그만큼 음악으로 일관시킨 예술가는 그전에나 뒤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